우포늪이 생긴 역사를 보면은 길게는 1억4천만전, 좀 더 짭게는 6천만전이라고 한다.
길고 긴 역사를 줄여서 지금 우포늪과 함께 해온 사람들 중에 가장 오랜된 분들을 만나,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릴 이야기를 기록해 두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우포늪 둘에에서 양어장을 하면서 반평생을 우포늪과 함께 해온 노기열 님 이야기를 기록한다.
▶우포늪 가까이에 있는 집에서 밭 정리작업 하는 모습
우포늪 둘레에는 늪을 습지보존지역으로 정해 보호하고 가꾸어온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 중에 방송모델과 그리고 사진 모델로 단골로 출연 하는 사람이 우포늪지킴이 주영학 감시원이고, 가끔 주영학 감시원의 부탁을 받고 목포늪에서 어부 모델이 되어 주는 사람이 노기열 님이다.
이른 아침 목포늪에서 방송 촬영용 모델이 되어 주고 나오면서 노기열 님이 늘 하는 얘기는 이렇다.
"내가 그렇게 안한다고 했는데, 발바리(노기열 님은 주영학 감시원을 늘 발바리라고 부른다. 여기서 발바리 라는 뜻은 오트바이를 타고 우포늪을 부지런히 누비며 다니면서 늪 감시를 잘 한다는 뜻임)자꾸 방송국 카메라를 불려 들이가지고 날 생고생 시키네"
주영학 감시원에 대해 늘 밉지 않는 욕을 하지만 두 사람을 멀리 할 수 없는 관계다.
주영학 감시원은 노기열 님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노기열 님이 집을 쉼터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기열 님은 주영학 감시원의 깡 무기인 오트바이를 활용해서 갖은 심부름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심부름은 소주를 사오는 것이다.
노기열 님의 아침 커피는 우포민박 간판 아래 있는 자판기에서 나온다.
아침 일어나면 자판기에 나오는 커피 반컵과 소주 반컵이 들어가는 노기열 표 '모닝커피' 로 시작한다.
모닝커피의 주 재료인 소주를 이방장터에세 배달해주는 사람이 주영학 감시원이다.
노기열 님이 주영학 감시원에게 던지는 밉지 않는 잔소리는 그런 밑바탕이 있다.
가끔 좋은 사람 만나 술 양이 많은 날이면, 함께 사는 아주머니의 걱정을 끼쳐 드린다.
커피와 소주와 이렇게 멋지게 만나게하는 사례는 전국에서 보기 힘들다.
커피회사와 소주 회사가 함께 모델로 쓸 사람이다.
노기열 님의 우포늪과 살아온 이야기다.
노기열 님은 우포늪에서 고기잡이 허가를 받은 몇 안되는 어부이다.
어부이지만, 곁다리 어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기도 잡지만, 잡은 고기를 양어장에 넣어 길려서 다시 파는 일을 주로 해왔다.
그에 초점에 맞춰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 우포늪에서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을 시작하다.
노기열 님은 1942년 1월 15일(음력)생이다.
노기열 님의 할아버지는 창녕 이방면에서 기독교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한 노상우 장로이다.
일제때 아버지는 일본 동경에서 메리야스 공장을 운영했고, 노기열 님은 그곳에서 태어 났다.
해방이 되고 귀국한 노기열 님 집은 이방면 장재마을에서 터전을 잡고 농사일을 했다.
늪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당시 우리나라 농촌은 가난했지만, 선친의 덕분에 찢어 지게 가난한 살림이 아니여서 학교를 갈 수 있는 형편은 되었다고한다.
하지만 노기열 청소년은 공부에 뜻이 없어 학교를 가라고 하면 놀기 바빴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창녕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쟁터였다.
노기열 님도 식구들과 함께 밀양으로 피난을 따났다고 한다.
청년기에는 이방면에서 창녕읍까지 늦은 밤, 창녕읍에 있는 영화관을 자주 다녔고, 영화관 맞은 편에 있는 화교가 운영하던 중국집도 찾은 기억도 있다고 한다.
===영화관이 있고 없고를 견줘 본다면 지금 창녕읍이 60년대 창녕읍 보다 떨어졌다고 했다. 80년때까지 면소재지는 몰라도 읍지역에서 영화관이 있었다. 어떤 읍에는 영화관이 3곳이 있는 곳도 있었다. 텔레비젼 보급 영향 때문이겠지만, 지역 주민들이 함께 모여 문화를 공유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영화관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방면 장재마을에서 창녕읍까지도 차로 가도 15분 걸리는 거리다.
영화가 끝나고 캄캄한 밤에 손전등 하나에 의지하면서 걸어 왔던 논둑길.
영화관 영화도 영화이지만, 영화를 보려 간 관객도 영화의 한 장면인 것이다.
창녕에은 성씨 뿐만 아니라 노씨들이 많이 산다. 대합면 주매마을은 노씨 집성촌이다. 노씨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생김새가 다들 잘 생겼다. 노기열 님은 키도 클 뿐만 아니라, 미남형이다. 많은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다.===
부친을 도와 농사를 짓다가 군대로 다녀오고, 26살에 이웃동네 처녀와 결혼을 해서 부친에게 받은 논 360여평, 밭 250여평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때는 우포늪이 고기가 엄청 많이 잡혔지만, 냉동,냉장 시설이 부족해서 유통에 어려웠고, 많이 잡은 고기를 창녕읍 시장에서 내다 파는 것이 전부였다. 큰 거물을 우포늪에 들이고 여럿 사람들이 힘을 합쳐 거물을 올려 잡은 고기를 트럭 짐칸에 싣고 창녕장 바닥에 풀어 내서 파는 방식이였다. 고기반 물반 일때 이야기이다.
- 우포늪에서 잡은 고기로 가물치 양어장을 만들다.
60,70년 빠른 산업화를 거치면서 유통에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양식업이었다. 주로 돈이 되는 것이 여자 보양식으로 인기 높은 가물치 양식업을 시작 했다,
우포늪에서 잡은 작은 물고기를 양어장에 넣어 키워서 파는 것이었다. 우포늪에서 잡은 작은 물고기는 가물치 먹이로 활용했다. 우포늪 둘레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은 작은 물고기는 상품 가치가 없어서 다시 살려 주거나, 버렸는데 버리는 작은 물고기를 구해서 가물치 먹이를 활용했다. 민물고기 양식을 하지만 민물고기가 잘 안잡혀 먹이를 바다 고기를 대신 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가물치에게 민물고기 먹이를 주었을때와 바다고기 먹이를 주었을때 고기 육질은 많이 차이 난다고 한다. 민물물고기 먹이를 먹은 가물치 육질은 단단 할 뿐만 아니라, 저향력도 높아 왠만한 스트레스에도 잘 죽지 않는다고 한다.
어린 가물치를 우포늪에서 잡을때 그물을 사용하는데 그물에 그린 가물치가 그물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어 처음에는 약을 발라 치료를 해주고 양식장에 넣기도 했다고 한다. 약을 바르는 일도 힘들어 그냥 넣었드니 약을 바를때나 바르지 않을때나 별반 차이가 없어 그 뒤 부터는 그냥 넣어서 길렀다고 한다. 우포늪에서 직접 잡은 어린 가물치에 먹이도 우포늪에서 잡은 물고기를 사용하니 가물치 상품성은 높았고, 자라는 속도도 빨랐다. 가물치 상태에 따라 3년, 5년을 길러 중간 상인에게 내다 팔았다. 주로 대구 칠성시장 상인들이 사가지고 갔다고 한다. 가물치는 동면을 하기도 하고 주는 먹이에 따라 크는 속도가 다르다. 그래서 양식장을 한 곳에만 할 수 없는 것이다. 크기에 따라 양식장을 여러 곳에 두었다. 당근 돈이 되었고, 몇 년이 지나자 같은 마을에는 양어장이 늘어나게 되었다.
▶우포늪(목포)에서 늪배타고 고기잡는 모습
- 양어장을 만들던 굴삭기로 농지개량 사업에 뛰어 들다.
양어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땅을 깊이 파야했다. 요즘은 굴삭기가 흔하지만, 70년 초만 해도 창녕에는 굴삭기를 가진 업체가 없어 대구에서 빌려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양어장을 다 만들고 난 뒤 굴삭기를 통째로 전세를 내어 농지개량사업을 하게 되었다. 우포늪 둘레에 있는 논은 비가 많이 오면 물에 잠기는 논이 많았다. 그래서 굴삭기를 활용해서 논에 흙을 돋우는 작업을 했다. 굴삭기 임대료, 굴삭기 기사 임금, 기름값을 제하고도 이윤이 많이 남았다고 한다. 다들 어려운 살림이지만, 여름철만 되면 물이 드는 논이 흙 돋우는 작업으로 물이 드는 횟수가 적어 지지, 빚을 내서 논흙돋우는 작업을 했다.
굴삭기를 놀리지 않고 이윤을 내기 위해 밤에도 작업을 했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정부지원사업으로 했을 일을 개인이 해결해야 했을 때였다. 양어장 사업과 논흙돋우는 일로 돈 버는 재미가 좋았다고 한다. 처음 굴삭기 빌리는 돈은 주위 사람들에게 빌렸다고 한다. 지금도 신용을 중요하다면 늘 강조한다. 나름 사업 수완이 좋은 셈이었다.
- 양어장도 자연재해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야심차게 시작한 양어장 사업과 논흙돋우기 사업으로 벌은 돈으로 산도 사고 논도 샀다. 그러나 몇 년 만에 한번씩 태풍과 함께 찾아오는 우포늪 범람은 양어장 둑을 무너뜨렸다. 두 번까지는 앙어장 둑이 무너지면 다시 고기를 잡아 기르고 해서 원상 회복을 시켰지만, 2002년 매미 태풍 때는 많은 피해를 봤다. 얼마 안 있으면 내다 팔 가물치 양어장이 우포늪에서 넘어 들어온 물로 둑이 무너져 가물치가 다시 우포늪으로 돌아갔다. 몇년동안 공들인 일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물을 가진 마을 사람들이 가물치를 잡아 말리기도 했지만, 한마리도 잡을 힘이 없었다. 90년부터 들여온 중국산 가물치로 인해 가울치 가격이 낮아졌고, 2002년 매미 태풍으로 양어장이 초토화 된 뒤로 대규모 양식업은 접고, 양어장 규모를 대폭 줄이고 나서 지금은 늪에 나가 베스,불루길 잡는 일만 하고 있다.
노기열 님과 함깨 사는 아주머니는 몇년 전만 해도 우포민박과 함깨 우포늪에서 잡은 붕어로 회나 찜, 곰탕을 해서 오는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민박과 붕어엑기스 짜는 일만 하고 있다. 어릴적 부터 바다 횟감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은 뼈가 억센 붕어 회가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릴적 부터 민물회을 맛 본 사람들은 민물회를 즐겨 먹는다.
늪 둘레에서 자란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해 우포늪에 오면 붕어회를 찾기도 한다.
대규모로 하는 바다 고기 양식으로 민물고기 수요은 갈수록 줄어 들것이다. 어릴적 먹어본 음식은 평생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은 몇 십년 뒤에는 어떤 이야기로 남아 있을까.(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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