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에 있는 화랑수련원 학생들이 많이 가는 곳이다.
7,80년대에는 학생회 간부들이 주로 가는 곳이었다.
수련원이 학생들을 혹독한 훈련 시설로 사용한 시절이 있었다.
경주 남천이 있는 샛길로 가다보면, 학생들이 수련하는 화랑수련원 있다.
내게는 화랑수련원은 단순히 학생들이 수련회 할때 이용하는 시설로만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안좋은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는 곳이 화랑 수련원, 화랑교육대이다.
1980년 전두환 독재자가 정권을 잡기위해,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런 가운데서 고등학교서도 데모라는 것을 했다.
학교 자율화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도 데모를 했는데, 데모를 하고 관철 시킨 것이 검은 신발을 흰 신발로 바꿔 신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얘기지만 그때는 그래도 고등학생들이 데모도 했다.
전두환 독재자가 자기가 저질런 짓을 아는지, 1981년 말에 들어서는 머리카락도 길게 길러주고 교복도 입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이 소문으로 나돌때이다.
머리카락 자율화 한다고해놓고, 공문이 안 왔다고 머리카락 자른 학생부장 선생님.
2학년이 다 끝날 쯤 학생부 주임 선생님이 우리 반에 수업을 들어오면서 가위를 들고 왔다.
머리카락이 3cm 이상 기른 학생들 머리카락을 자르겠다는 것이다.
이미 앞 시간에 다른 반에서 머리카락이 긴 아이들은 머리카락이 잘렸고, 그 소문이 우리반까지 들리자 아이들 사이에는 불만들이 쏟아졌다.
학생주임 선생님이 머리카락을 짜르자는 요지는, 아직 3학년이 되지 않았고, 교육청에서 내려온 공문에는 머리카락을 자율화 한다는 공문이 없으니까, 2월까지는 이 규정대로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 몇 아이들은 불만 섞인 투로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항의를 했다.
그러자 학생주임 선생님은 교무실에 있는 공문을 가지고 간다고 하면서 교무실로 갔다.
그 사이에 반아이들은 웅성거렸다. 그때 반장이였던 친구가 “모두들 가방 싸라 집에가자!” 하자
모두들 가방을 들고 우르르 교문 밖으로 나가 저수지가 있는 산으로 갔다.
교실로 돌아온 학생주임 선생님 아이들이 없자 담임선생님과 함께 오트바이를 타고 우리를 쫓아왔다.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머리카락 자르지 않을테니 학교로 돌아가자, 그리고 오늘 일은 아무일도 없는 걸로 한다. 하면서 아이들을 설득 시켰고 아이들은 그 약속을 믿고 교실로 돌아왔다.
담임 선생님과 학생부 선생님 생각은 달랐다.
그리고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은 “너희들 왜 책가방을 들고 갔나? 그냥 그 수업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방을 놓고 가야지 가방을 들고 나가면 모든 수업을 거부하는 것 아니냐면 그 점만 나무랬다.
” 여기서 그쳤으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이 커지도록 한 선생님은 학생부 교련선생님이였다.
다음 시간 교련선생님은 입에 담배까지 물고서 학생부 선생님 두 명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와 출석부를 보고 다짜고짜 친구 이름을 불렸다.
교탁 앞에 불려간 친구 네 명은 엎드린 상태에서 몽둥이로 엉덩이를 흠씬 맞았다.
그리고 교련선생님은 “주동자 누구야! ” 라면 주동자 이름을 대라며 억박질렀다.
그러던중 교실 가운데 앉은 친구가 손을 들면서 “선생님! 주동자는 없고요.
우리 모두가 한 일입니다.“ 라고 얘기를 하자.
교련선생님은 ”니가 주동자구나! 이리 나오라.“ 하면서 친구를 끌어내서 몽둥이를 때릴려고 하자,
그 친구는 몽둥이를 손을 막고, 몽둥이를 빼앗아 창문으로 던져버렸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나자 그동안 숨죽여 있던 아이들이, 동시에 일어나면 창문으로 달아나고 교련선생님은 뒷 쪽
아이들이 덮쳐 넘어졌다.
교실 밖으로 나간 몇 몇 친구들은 분을 참지못하고 옆 교실 창문과 실습실 창문(나무로 만든 유리문이 아닌 샤시로 만든 창문) 쇠뭉치로 모조리 깨트렸다,
이 사건으로 경찰서에서 조사가 나왔고, 창문을 깨트린 학생을 퇴학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선생님도 있었다. 담임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의 노력으로 퇴학은 당하지않고 창문 값을 내는 것으로 끝냈다.
그때 가담한 한 친구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깨트린 창문 값을 내지못했다.
~화랑은 삼국통일 우리는 남북통일 글귀가 이채롭다.
화랑교육대에서 혹독한 고문에 시달린 친구의 눈물
그 해 봄이 지날 무렵 각 학교에 문제되는 학생들 2명을 뽑아 화랑교육대로 보내라는 공문이 학교로 내려왔다.
말이 좋아 화랑교육대지 어른들을 무지막지하게 잡아 훈련시키고, 고문을 가했던 곳이 삼청대라면,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는 민주화 열기를 사전에 꺽기위해 만든 것이 화랑교육대였다.
모두가 주동자라며 선생님에게 당당하게 얘기하고, 깨트린 창문값을 내지못했던, 그 친구는 그렇게 화랑교육대에 보내졌던 것이다.
3주간 화랑교육대를 다녀온 그 친구는 한 동안 말없음을 통해, 너무나 혹독한 훈련을 받았단 것을 대신했다.
그 친구가 교실창문에서 운동장을 바라고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눈에서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학교졸업을 하고 다시 만나 그때 그 얘기를 할때 그 친구는 그냥 눈물만 흘렸다.
<돌처럼 단단하고 별처럼 빛나자던>그 친구는 지금 볼 수가 없다.
그 친구가 생각 날때면 부르는 노래 조용필 <친구여>가 그 친구다.
어릴적 한국전쟁 당시 죄없는 사람들이 골짜기로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을 ‘골로 간다.’ 로 표현했다.
‘말 많으면 빨갱이.’ 이 나라에서는 정부에 반대하다가는 ‘골로 간다.’ 는 말은 어린시절 그 어떤 협박말보다 섬뜩하게 들렸고 아직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
80년대에는 ‘삼청교육대 보낸다.’ 말이 공포의 유행어였다.
삼청대 못지않은 화랑교육대도 우리 역사에 있었다.
광주 5.18민중항쟁 30주년이 되는 해에 꼭 하고싶은 말이다.
**오래전 쓴 글인데 찾아도 없어서 다른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것을 기록 차원에서 다신 옯긴다.(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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