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는 이야기

산에서 죽어 간 사람들

갈밭 2009. 6. 20. 17:53

 

지리산 천왕봉을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길이 중산리를 거쳐 오르는 길이다. 중산리 주차장 한쪽켠에 가정집 이층집 모양을 한 지리산빨치산 토벌전시관이 있다. 언뜻 건물 모양만 보고는 정원이 있는 가든을 떠 올릴 수 있다.

 

 

 

 ▶경남 산청군  지리산 빨치산토벌 전시관.

 

우리나라 곳곳에는 전쟁에 얽힌 기념관과 전시관이 많다. 특히 경남 지역에는 이순신과 임진왜란, 한국 전쟁에 관련된 기념관과 전시관이 많다. 전쟁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전쟁의 아픔을 딛고 평화를 기념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옳은 말이다.

 

 

 

국방군, 인민군 모두 피를 나눈 형제다.


 

전쟁 기념관 이름을 쓰고 있는 곳이 서울 용산전쟁기념관과 경남창녕 남지에 있는 박진전쟁기념관이 있다.


이념 갈등 때문에 같은 형제 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던 역사 흔적지로는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전시관, 강원도 평창에 있는 이승복 기념관이 있다. 같은 아픔 역사 흔적지이지만 평화 기념관으로 이름을 붙힌 곳이  ‘제주 4.3평화기념관’ 이 있다.


남과 북이 나눠져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아직까지 이념으로 갈등이 이어져오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런 현대사 이야기를 하기에 조심스런 점도 있다. 부모에게 받은 영향과 학교 선생님 영향에 따라 아이들의 생각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전쟁을 기념하기에 만든 기념관이라도 평화를 이야기 해야겠지만, 전시물 내용이 그렇지 않을때는 서로가 혼란 스러울때가 있다.

 

 

전쟁을 겪은 역사도 안타깝지만 그런 역사가 우리의 삶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더 안타까움을 느낀다. 지난주에 찾아간 지리산 빨치산토벌 전시관도 이런 곳 중에 하나이다.


먼저 ‘빨치산’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말 뜻을 알아보자.

 

 


 

빨치산 수색장면 모형/전시관 바깥에 있는 빨치산이 숨어 있었던 구들장 밑. 그들은 살고자 했다. 

 

* 빨치산

빨치산은 '파르티잔(partisan)'에서 나온 말이며,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다. 당원․동지, 당파 등을 뜻하 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스파냐어에서 나온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 빨갱이

공산주의 이념 가운데 피지배자의 투쟁을 강조하기 위해 빨간색을 상징물에, 특히 국기에 쓴 것에서 아마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 공비               

 공산당 또는 그 지시 아래 활동하는 게릴라를 도둑떼로 몰아 이르는 말이다.


* 토벌대

 주로 무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둑질을 일삼는 무리를 처 없애는 조직.


* 게릴라  

 일정한 제복을 입지 않고 또 정식 군대에 속하지 않으면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 또는  조직을 말한다. 정해진 옷을 입지 않고 또 정식군대에 속하지 않고 적과 싸우는 사람 또는 그 단체 를 말한다.???게릴라???는 에스파냐 말로 ???작은 전투???를 뜻하는  말로서,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원정했을 때, 스페인 사람들이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운 사람들을 말한다.           

 

 

 

▶빨치산 토벌 전시관 밖에 있는 빨치산 토벌 영웅 권영도 경사 흉상/잡혀온 빨치산 사진. 


 

빨치산이 산에서 그렇게 죽어간 이유는 알려면 먼저  북한 인민군이 만들고자 했던 나라의 이념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자. 그들이 바라는 사회는 ‘ 능력껏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 더 나아가 '능력껏 벌어서 필요한 만큼 나누는 사회' 를 만들고자 했다.  즉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였던 것이다. 북한이 지금 어떠한 처지에 있는가는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한국 전쟁 당시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론적인 사회는 그런 것이였다.


1963년 마지막으로 붙잡힌 여자 빨치산 정순덕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순덕은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태어나 가난한 집안 살림에, 입 하나 덜기 위해 열 여섯 나이에 한 살 많은 총각 성석근과 1950년 결혼을 하게 된다. 남편 성석근도 인민군 점령하에서  땅없는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고루 잘 살수 있다는 말에 인민군이 만든 단체인 ‘민족 애국 청년단’ 에 가입해서 부역을 하게된다. 전쟁이 역전되어 남편은 지리산에 들어가게 되고, 빨갱이 남편을 찾아내라며 경찰의 시달림을 받던 정순덕도 남편을 찾아 지리산에 들어가면서 13년동안 산짐승 같은 생활을 하다가 1963년 붙잡혀 1985년까지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지리산에 쫓기는 빨치산이나, 빨치산을 찾아 치열한 전투를 치루던 토벌대나 죽고 죽이는 전쟁에 휘말려 그렇게 죽어 간 것이다. 이념 굴레에서 그렇게 엮이고,  살기위해서 그렇게 피를 나눈 동포를 죽여야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남긴 이념의 상처는 독재정권의 전유물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고 그 고통은 이어지고 있다.

 

 

 

전시관 바깥에 있는 조각작품. 전쟁은 어떤 이유도 일어나서는 안된다.

 

대한민국에서 빨갱이는  함께 살수 없는 하늘이 내린 형벌 이상이였다. 어릴적 어른이 잘못한 행동을 지적 하는 말을  하면, ‘말 많은 놈은 빨갱이 새끼’ 라 하면서 아이의 말문을 막았던  생각이 짧은 어른도 있었다. 청년이 되어 정치에 관심가져 잘못된 정부정책에 비판이라도 할 요량이면 빨갱이라고 몰았다.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애기하는 것이 빨갱이라면 나는 그럼 빨갱이다.’ 라고 항변을 했던 어느 노동자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다.

 

 


 

얼마전 빨치산으로, 토벌대로 활동 했던 분이 서로 만나 부등켜 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았다. 누가 남과 북으로 누가 빨치산과 토벌대로 나누고 싸울 수 밖에 없는 사회를 만들었을까? 남과 북으로 나눈 것도 모자라 동과 서로, 수도권과 지방으로, 가진자와  못가진자를 나누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런  대립구도를 만드는 사람들이 힘없는 백성을 다시 빨치산으로 몬다면, 2000년형 빨치산 토벌이 이어 지는 것이 아닐까? 무섭다.